ㆍ작성일 :
23-08-07 14:03
[조선일보] 치매 노인들의 옥탑 다방… 틀려도 늦어도 괜찮아요 | |
---|---|
글쓴이 : 관리자 | 조회 : 1,410 |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3/08/04/X25KBH7TUZ… [3046] | |
지난달 31일 오후 1시쯤 찾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 치매안심센터. 이곳 옥상엔 15㎡ 남짓한 카페 ‘반갑다방’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색 앞치마 차림의 70대 ‘알바생’이 “어서오세요” 하면서 손님을 맞았다. 아이스 원두 커피를 주문하자 20대 바리스타 못지않게 뚝딱 커피를 만들어 냈다. 그는 치매를 앓고 있는 김운자(74)씨. 한 달 전부터 이곳 카페에서 일주일에 이틀, 3시간씩 일하고 있다.
김씨는 10년 전 치매 진단을 받았다. 치매는 임상 치매 척도(CDR) 점수에 따라 최경도, 경도, 중증도, 중증 등 4단계로 나뉘는데 김씨는 이 중 가장 흔한 경도 치매다. 2021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전체 치매 환자(87만명)의 58%인 51만명이 최경도 또는 경도 치매다. 꾸준히 약물 치료 등을 받으면 중증으로 진행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단계라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 김씨는 전혀 치매 환자 같지 않았다. 김씨는 “가끔 메뉴를 깜빡할 때도 있지만 카페 일은 자신 있다”고 했다. 한 달 전 문을 연 이 카페의 알바생 3명은 모두 김씨처럼 경도 치매를 앓는 환자다. 주문대에는 ‘주문이 틀려도, 음료가 조금 늦게 나와도 이해해주세요’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주방 수납장에는 각각 ‘현미 녹차 티백’ ‘아이스티 가루’ 등 재료 이름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크게 적혀 있다. 손님이 주문한 메뉴를 깜빡하지 않기 위해 알바생용 ‘메뉴 접수판’도 따로 있다. 여기에는 메뉴 이름 옆에 빨간색 칸과 파란색 칸이 있는데, 손님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파란색 칸에 표시해 기억한다. 김씨는 “제가 치매 환자인 줄 아무도 몰라요” 하며 웃었지만 처음 치매 진단을 받던 날은 충격이 컸다고 한다. 그는 치매를 이기기 위해 왕복 2시간씩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치매안심센터를 다녔다. 매일 일기를 썼고, 종이접기도 배웠다. 카페 일도 그렇게 시작했다. 치매안심센터는 지난달 건물 옥상의 자투리 공간에 이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센터 관계자는 “센터 어르신 중에는 자신이 치매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경우가 많다”며 “알바 활동으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치매 치료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카페를 냈다”고 했다. 카페는 복지부와 서울시, 은평구 예산으로 운영된다. 카페는 영업 한 달 만에 치매라는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의 사랑방이 됐다. 하루 손님은 15~20명 남짓인데, 대부분 이곳 센터에서 치료받는 환자다. 이날도 4인용 테이블 네 개가 손님 11명으로 꽉 찼다. 치매 환자라고 대화 소재가 특별하진 않다. “댁네는 할아버지(남편)가 참 자상하더라”는 등 가족 이야기, 무더위 이야기 등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카페 알바생들은 “나도 연습하면 다시 똑똑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입을 모았다. 부부가 함께 치매를 앓는 김무웅(80)·오창옥(72)씨는 아침 9시면 손 잡고 카페에 출근한다. 아내인 오씨가 먼저 카페 일을 시작했는데, 치매에 걸린 뒤 길을 자주 잃어버리는 아내가 걱정돼 결국 김씨도 따라나섰다. 그러다 이젠 완벽한 한 팀이 됐다. 커피는 김씨가, 차는 오씨가 만든다. 가끔 오씨가 주문을 착각하는 실수를 하면 김씨가 함께 나가 사과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 토목 현장에서 일하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를 누볐다는 그는 “은퇴한 뒤 아내와 집 안에서 낮잠 자고 휴대폰으로 고스톱만 치자니 점점 더 바보가 되는 것 같더라”며 “5년 전 둘 다 치매 진단을 받고 사람들과 교류도 거의 끊었는데, 카페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얘기를 많이 하니 요즘은 우리가 치매인 것도 잊고 산다”고 했다. 그는 “금실도 좋아져 다시 신혼이 찾아온 것 같다”며 웃었다. 김운자씨는 “카페 일을 하면서 나도 가족한테 짐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했다. 김씨는 미혼인 40대 아들과 같이 살면서 집안일을 한다. 근처에 사는 딸 반찬도 챙긴다. 그의 남편은 오랫동안 당뇨 합병증을 앓다가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김씨는 “아픈 가족 돌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며 “그래서 더 열심히 카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